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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태생의 지휘자.

20세기 후반에 카라얀과 같은 시대를 살면서 그의 인기에 필적할 수 있는 지휘자는 거의 없었다. 사실 루돌프 켐페,오이겐 요훔,존 바비롤리,앙드레 클뤼탕스,요제프 카일베르트 등은 예술적으로 보아 결코 카라얀에 뒤떨어진다고 말하기 힘든 초일급인데도 카라얀에 인기에서 비길 수는 없다. 좋은 의미건 나쁜 의미건 간에 말이다. 하지만, 굳이 경쟁자를 한 명 들라고 하면 아무래도 칼 뵘을 꼽아야 할 것 같다. 예술성이나 녹음의 중량감이나 레파토리 측면에서 카라얀과 견줄 만한 사람은 그 외에는 달리 떠오르지 않는다. 그는 푸르트뱅글러,크나퍼츠부쉬 같은 대천재는 제외하고라도 슈리히트,마타치치,몽퇴,발터,클뤼탕스,클렘페러 등과 더불어 초일류급에 속하는 지휘자였다. 그가 지휘했던 비인 필하모니의 단원들도 표면적으로는 그의 후임이었던 카라얀을 내세우면서도 속으로는 칼 뵘을 더 높히 평가했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나퍼츠부쉬가 타계했을 때,그들은 "이제는 슈트리히와 뵘뿐이다" 라고 한탄했었다는 데서도 칼 뵘의 지휘자로서의 역량이 대단했음을 잘알 수 있다.

1.칼 뵘의 생애와 음악세계

칼 뵘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황혼이 드리워지고 있던 1894년 8월 28일에 오스트리아 남부 슈타이어마르크 (Steiermark) 지방의 중심지 그라츠 (Graz)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레오폴트 뵘 (Leopold Bohm)은 명망 높은 변호사로서 그라츠 국립가극장의 법률고문을 지내고 있었고, 꽤 훌륭한 바리톤 음성을 지니고 있어 바그너 작품의 바리톤 배역곡들을 곧잘 부르곤 했을 뿐 아니라 당대의 헬덴 테너 레오 슬레착 (Leo Slezak)과도 교분이 두터웠다 한다. 이렇듯 그라츠의 명문가에서 삼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난 칼 뵘은 어릴 적부터 다양한 교육을 받았는데, 음악교육 역시 매우 전문성을 띠고 있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어린 시절 그는 아버지로부터 피아노를 배운 것을 시작으로 하여 음악교사들로부터 체계적인 음악교육을 착실히 받아나가고 있었는데,그러던 중 그의 아버지와 친분이 있었던 빈 국립가극장의 지휘자 프란츠 샬크 (Franz Schalk)에게 인정을 받아 그의 소개로 빈으로 가게 되었다.

빈에서 브람스의 음악적 동지였던 음악학자 오이제비우스 만디체프스키 (Eusebius Mandyczewski)로부터 화성학,대위법,작곡 등을 사사하였다. 이후 그는 아버지의 희망에 따라 음악과 동시에 전문적인 법률공부를 계속하였고,또한 1914년에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에는 군인의 길을 걷기도 하였다. 하지만 훈련 중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함으로써 군인의 길을 포기하고 고향 그라츠로 귀향하였다.1916년부터 그라츠 가극장 (Grazer Opernhaus)에서 코레페티토어 (Korrepetitor; 오페라 공연에 있어 피아노 반주로 가수들을 연습시키며,성악코치를 하는 사람)로 일하는 한편,1917년에는 네슬러의 오페라 <제킹엔의 나팔수,Der Trompeter von Saekkingen>를 지휘하여 지휘자로 정식 데뷔를 하였다. 이 공연을 계기로 그동안 작곡가,성악코치,지휘자 등의 여러 역할들을 고루 거쳤던 그는 드디어 지휘자로 방향을 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1918년의 패전과 제국붕괴 이후 그 자신이 안주하던 구질서의 몰락과 혼란을 겪게 되었던 청년 뵘은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그라츠 대학에서 법률공부를 계속하여 1919년 법학박사학위를 받게 되지만,이 박사학위 취득을 끝으로 아버지에 대한 의무는 마쳤다는 생각과 함께 법률가로서의 생활을 접고 예술가의 길에 정진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본격적인 지휘자로서 그의 첫 커리어는 물론 당시 그가 몸담고 있었던 그라츠 가극장의 카펠마이스터였는데,재임 첫 해에 그가 다루었던 레퍼토리는 요즘에 와서는 거의 공연되지 않는 오페레타 작품들이나 서민적인 징슈필 등이었다. 하지만,이런 국지적인 레퍼토리에 만족하지 못한 그는 차츰 베르디나 바그너 등 본격적인 레퍼토리를 무대에 올리게 되었고,특히 1919/20년 시즌에 올린 바그너의 <로엔그린,Lohengrin>은 리허설만도 70회를 강행할 정도로 공을 들인 공연이었는데,이 공연의 성공을 계기로 그는 도약의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리고 1920년대에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지휘자 칼 무크 (Karl Muck)의 후원을 얻게 되었으며,그의 추천으로 브루노 발터 (Bruno Walter)의 초청을 받아 뮌헨의 바이에른 국립가극장 (Bayerische Staatsoper)의 제 4석 카펠마이스터직에 취임하였다. 그의 뮌헨시대는 기본적으로는 지휘자로서의 수업시대에 포함시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특히 당시 음악감독이었던 브루노 발터로부터 모차르트와 바그너에 대한 진지한 가르침을 받게 되는데,이 시기의 가르침이 그가 평생동안 그 작품들을 해석하는데 있어 커다란 영향을 끼쳤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아무튼 6년간에 걸친 뮌헨 시대에 그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장미의 기사,Der Rosenkavalier>나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Der Ring des Nibelungen>등 굵직한 작품들을 올리며 역량을 키워나가는 성과를 이루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시기가 그에게 안겨준 가장 큰 행복은 당시 바이에른 국립가극장의 소프라노 가수였던 테아 린하르트 (Thea Linhard)를 인생의 반려자로 맞이한 것이다. 

1927년 그는 보수적인 뮌헨과는 전혀 다른 문화적 분위기를 지닌 다름슈타트의 헤센 주립극장 (Hessisches Landestheater)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하였다. 뵘은 여기에서 알반 베르크(Alban Berg),에리히 볼프강 코른골트(Erich Wolfgang Korngold),레오슈 야나첵(Leos Janacek),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Serge Prokofiev),에른스트 크르셰넥(Ernst Krenek) 등 동시대 음악가들의 작품들을 통해 다양한 현대 레퍼토리들에 익숙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시기에 그가 얻은 가장 큰 수확은 극장 총감독인 칼 에베르트(Carl Ebert),연출가 아르투르 마리아 라베날트(Arthur Maria Rabenalt),무대미술가 빌헬름 라인킹(Wilhelm Reinking) 등 전위적 무대의 창조자들,그리고 루돌프 빙(Rudolf Bing,빙은 훗날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총감독이 된다)같은 젊고 패기넘치는 극장전문가들과 더불어 공동작업을 하면서 오페라 연출은 물론 현대적인 오페라 제작에 있어 여러가지 노하우를 체득하게 된 것이다. 

훗날인 1930-40년대 함부르크와 빈에서의 오스카르 프리츠 슈(Oscar Fritz Schuh)-카스파르 네어 (Caspar Neher) 콤비나,1960년대 베를린과 바이로이트에서의 빌란트 바그너 (Wieland Wagner)와의 작업 등 자신과 혼연일체가 될 수 있는 연출가들을 선정하고 함께 공동작업을 해내어 가는 오페라 지휘자로서의 직관과 안목을 키우게 된 것이었다. 

한편,이 시기에 새롭게 올린 <로엔그린> 공연은 바그너의 아들이자 당시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의 총감독이었던 지크프리트 바그너(Siegfried Wagner)로부터 찬사의 서신을 받을 정도로 높은 완성도를 보인 공연이었다. 

1931년부터 3년간 계속된 뵘의 함부르크 국립가극장 (Hamburgische Staatsoper)의 음악감독 시절은 그 짧은 기간으로 인해 전기작가들로부터 흔히 함부르크 막간극 (Hamburger Zwischenspiel)이라고도 불리지만,이 시기는 칼 뵘이라는 지휘자를 진정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스페셜리스트로서 거듭나도록 만드는 중요한 기점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함부르크 무대에 "엘렉트라 (Elektra)"를 올려 대성공을 거둔 이 젊은 지휘자에게 작곡가 슈트라우스는 대단한 호의를 보이게 되고,뵘 또한 슈트라우스에 대한 깊은 존경의 마음을 지니게 되었다. 이후 두 사람의 예술적 동료의식은 1949년 슈트라우스가 서거할 때까지 계속되는데, 훗날 뵘은 당시 슈트라우스와의 교류 초기를 회상하며 슈트라우스로 인해 모차르트에 대한 진정한 애정을 갖게 되었다고 술회하였다. 1933년 봄,뵘은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und Isolde>를 지휘하여 빈 국립가극장 (Wiener Staatsoper)에서의 성공적인 데뷔를 하였다. 동시에 빈 필하모닉 (Wiener Philharmoniker)의 콘서트 역시 처음으로 지휘하게 되는데,결국 이 시기는 그에게 있어 정상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발판을 제공한 의미를 지니고 있어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시기로 평가될 수 있다. 또한 다름슈타트와 마찬가지로 현대음악에 대해 개방적인 함부르크 국립가극장의 전통은 그로 하여금 동시대 작곡가들과의 친분을 더욱 굳게 다지고 그 작품들을 더욱 원숙하게 해석할 수 있게 만든 발전기이기도 했다. 

1934년에 뵘은 프리츠 부쉬 (Fritz Busch)의 후임으로 드레스덴의 작센 국립가극장 (Saechsische Staatsoper)의 음악감독에 취임하게 되었다. 이 드레스덴 시기는 오페라 지휘자로서 그에게 있어서는 원숙기라 할 수 있는 시기였다. '북쪽의 피렌체'라고도 불리울 정도로 문화와 예술이 융성했고,베버,바그너,슈트라우스의 체취가 그대로 남아 있었던 이 고도는 뵘에게 있어서는 예술적인 이상향과도 같은 곳이 되었다. 다름슈타트 시절을 통해 익숙해진 동시대 작곡가들의 작품들과 그동안 꾸준히 연마해 왔던 바그너 작품들의 원숙한 해석,1934년 <장미의 기사> 공연의 대성공,1935년 <말 없는 여인,Die schweichsame Frau>의 초연 등을 통해 확고한 입지를 굳혔다. 그는 1938년 드디어 슈트라우스로부터 <다프네,Daphne>를 헌정 받아 초연하였고,그야말로 젊은 지휘자로서의 황금기를 구가하였다. 또한,1938년에는 처음으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Salzburger Festspiele) 무대에 데뷔하기도 하였다. 1942년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Die Meistersinger von Nuernberg>의 기념비적인 무대를 끝으로 그의 화려한 드레스덴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는데,그가 드레스덴을 떠나던 마지막 날에는 수백명의 인파가 역까지 배웅을 나왔다 한다. 단 한 번의 좌절도 없이 착실히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던 뵘으로서는 빈 국립가극장의 음악감독을 맡던 시기인 1943-1945년의 3년 남짓한 기간은 독일음악계의 정상의 자리에 오름으로 인해 그에게 있어서 가장 명예로운 시기였던 동시에 패전을 향해 기울어 가던 2차대전 말기의 불안감이 예술전반을 지배했던 암울한 시기이기도 했다. 

1938년 오스트리아를 병합하여 독일제국의 일개 오스트마르크(Ostmark) 주로 격하시켜버린 나치정권의 간섭은 당연히 빈 국립가극장에까지 미쳤다. 이 당시 뵘의 나치 협력사실은 신빙성 있는 그의 전기들에서도 그다지 상세히 다루어져 있지는 않고, 여러 가지 증언들을 통해 당시 그의 행적들 (예를 들어 나치에 동조하는 연설을 했다든지 하는)이 유추되고 있을 따름인데,아무튼 예술계의 요직에 있는 젊은 대가였던 그 역시 당시 독일 내에서 활동했던 많은 예술가들처럼 소극적이나마 나치에 협력하였던 것은 사실이었던 것으로 밝혀져 있다. 이는 당시의 예술가들이 짊어져야 했던 공통된 비극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아무튼 뵘의 빈 시절은 그동안 그가 다루어왔던 모든 레퍼토리를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완성시키는 그의 예술적 자아의 완성기였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그의 예술적 아버지라 할 수 있는 만년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는 가장 밀접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이 시기의 가장 대표적인 공연은 역시 1944년 6월 11일 슈트라우스의 80회 생일을 기념하여 빈 국립가극장에서 가졌던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Ariadne auf Naxos> 공연이었다고 전해진다. 

1945년에 접어들면서 어두운 패전의 그림자는 빈에까지도 여지없이 드리워졌고,결국 그해 3월 12일 연합군의 폭격에 의해 빈 국립가극장 건물이 파괴됨으로써 뵘의 1차 빈 시기는 종언을 고한다. 국립가극장 건물이 파괴되었을 때,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현장으로 달려갔었는데,당시 그의 막내동생인 발터 뵘 (Walther Bohm)에게 보낸 전보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은 빈 국립가극장이 그의 생명과도 같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으며,그 붕괴를 지켜보면서 얼마나 깊은 상심을 느꼈는지 그 절절한 심정이 그대로 담겨 있다. 전쟁이 끝난 후 오스트리아를 점령하고 일시적으로 통치한 연합군 사령부는 전쟁기간동안 빈 국립가극장의 음악감독으로서 그의 나치협력문제를 이유로 그 시기 다른 많은 독일의 음악가들에게도 그랬던 것처럼 일정기간 공식적인 지휘활동을 금지한다. 약 2년 남짓한 이 기간 동안 그는 고향인 그라츠로 낙향하여 그동안 숨돌릴 틈도 없이 바쁘게 달려온 삶을 다시 돌아보고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심신을 추스르는 재충전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1947년 그에 대한 지휘금지 조치가 해제되면서 그는 빈과 잘츠부르크를 중심으로 활동을 재개하기 시작하였다. 가극장 건물이 소실된 빈 국립가극장의 공연은 한동안 안 데어 빈 극장 (Theater an der Wien)에서 이루어졌고,1949년에는 빈 국립가극장의 파리 공연도 성황리에 이루어졌다. 역시 대전말기의 폭격으로 가극장건물이 소실되어 섭정공 기념극장 (Prinzregenten Theater)으로 옮겨 공연을 계속하고 있던 바이에른 국립가극장에서의 활동도 활발히 재개하였다. 그는 1954년,생애 두 번째로 빈 국립가극장의 음악감독직을 맡게 되었고,1955년 11월 5일 재건된 국립가극장 건물에서 역사적인 재개관 기념공연으로 베토벤의 <피델리오,Fidelio>를 지휘하는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감격도 잠시,빈이라는 도시 특유의 고질적인 파벌싸움에 의하여 그는 1956년에 국립가극장 음악감독직을 사임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의 후임자가 되기도 하는 카라얀을 음악감독으로 옹립하는 사람들과의 알력은 선정적인 저널리즘에 의해 다소 과장되어 알려진 면이 없지 않다. 그러한 파벌분쟁과 시기,알력 등은 빈 특유의 나쁜 전통으로서 어느 분야,어느 직책에서도 항상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서 카라얀도 역시 그런 과정을 거쳐 빈을 떠나게 되고,후대의 마젤이나,아바도 등도 마찬가지였다. 

뵘으로서는 인생의 후반기였던 20세기 후반의 독일 음악계에서 카라얀과 어느 정도는 라이벌이라는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으나,그 역시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저널리즘에 의해 부풀려진 면이 강했을 뿐 아니라,무엇보다 뵘과 카라얀은 스타일은 물론이고 가는 길이 엄연히 달랐다. 실제로 뵘과 카라얀은 서로에게 존경과 호의를 느끼고 있었고,뵘의 85회 생일에 카라얀은 잘츠부르크에서 뵘을 모신 자리에서 헌사를 하기까지 하였다. 한편, 뵘은 이러한 독일-오스트리아 권에서의 다망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그는 외국에서의 객원지휘 역시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1948년에는 밀라노 스칼라 가극장 (Teatro alla Scala) 무대에 데뷔하였고,1950년에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콜론 극장 (Teatro Colon)에서 베르크의 <보체크,Wozzeck>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빈 국립가극장을 사임한 이후에는 그 활동범위가 더욱 넓어져 1957년에는 다름슈타트 시절의 동료인 루돌프 빙이 총감독으로 있던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가극장 (Metropolitan Opera)에 초청되어 <돈 죠반니,Don Giovanni>와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지휘하여 깊은 인상을 남겼고,이 때의 성공을 바탕으로 이후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정기적으로 메트에서 객원지휘를 하게 되었다. 

1959년 베를린 도이치 오페라 (Deutsche Oper Berlin)에서 빌란트 바그너의 연출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공연한 것을 인연으로 하여,1962년에 그는 드디어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등장하게 되었다. 1971년까지 10년에 걸쳐 바이로이트의 지휘대에 오르면서 그는 빌란트 바그너 연출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와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니벨룽의 반지>,그리고 아우구스트 에퍼딩(August Everding) 연출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Der fliegende Hollaender> 등 네 편의 공연을 두루 지휘하면서 신바이로이트 (Neubayreuth) 양식의 절정기를 장식하였다. 

1956년 빈 국립가극장을 사임한 후 뵘은 상임이나 음악감독 등 행정적인 직책들을 극구 사양하며 좀더 자유로운 객원지휘자로서 폭 넓은 활동을 할 것을 원했다. 

1963년 페렌츠 프리차이(Ferenc Fricsay)의 급서로 상임이 공석이 된 베를린 도이치 오페라의 일본공연을 대신 이끌었던 것을 계기로 극장총감독이었던 구스타프 루돌프 젤너(Gustav Rudolf Sellner)로부터 음악감독직을 제의받았으나 거절하였고,1954년 이후 상임지휘자를 두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세웠던 빈 필이 1970년에 예외적으로 그를 상임으로 모시려 했으나 이 역시 정중히 사양하였다. 이미 그는 어느 하나의 포스트에 얽매일 뜻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생애에서 마지막 10여년간은 그가 이루었던 모든 업적과 그에 대한 모든 사람들의 존경이 명예로운 결실을 이루었던 시기였다. 
1964년 오스트리아 정부는 그에게 오스트리아 음악총감독 (Oesterreichischer Generalmusikdirektor)이라는 명예직을 수여한 것을 비롯하여,1974년 오스트리아 문화성의 칼 뵘 상(Karl Bohm Preis) 제정, 1974년 독일 후기낭만주의 전통 계승의 상징인 '니키쉬 링'의 계승자였던 그의 업적을 기린 '니키쉬-뵘 링(Nikisch-Bohm Ring)'으로의 개명,빈 필의 명예 종신음악감독(1970),함부르크 국립가극장의 명예 지휘자(1974),런던 심포니의 명예 음악감독(1977),뮌헨 바이에른 국립가극장의 명예 지휘자(1978) 등이 그것이었다. 

1971년 그의 분신과도 같았던 빈 필하모닉이 DECCA와의 전속계약에서 자유로워진 것을 계기로 이미 기존의 레코딩이 존재하던 곡들을 빈 필과 함께 DG에서 정력적으로 재녹음하였고,빈 필의 해외 연주여행 역시 직접 이끌었는데,1971년의 첫 번째 모스크바 연주여행,그리고 1977년과 1980년의 일본 공연 등이 그것이었다. 

이 밖에도 1977년 겨울에는 런던의 로열 오페라 코벤트 가든(Royal Opera, Covent Garden)에 데뷔하였고,1978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데뷔 40주년 기념공연과 1979년 8월 28일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그 자신의 85세를 기념하는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 기념공연을 직접 지휘하는 등,뵘은 그 생애의 만년에 이르기까지 정력적이고 쉼 없는 왕성한 활동을 보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리고 1981년 여름,뵘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참가하기 위해 잘츠부르크 교외의 별장에 머물렀으나 8월 5일 뇌일혈로 쓰러졌고,87회 생일을 2주 앞둔 그해 8월 14일,영원한 안식에 들었다.

뵘의 음악은 처음에는 왠지 거칠고 윤기가 없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하나 곡이 진행될수록 이상한 응집력으로 감상자의 감정을 흔들어 의지와 정열로 가득찬 뵘 스타일의 참맛을 느끼게 만들고 만다. 뵘의 스타일은 정확하고 엄격하면서도 소박했고,작품전체의 조형에 강박적이라 할 만큼 집착하였으며,냉철하고 현실적이었다. 감상에 빠져버린 허우적거림,과도하게 부풀려진 스케일,또는 육중하게 청중을 짓누르는 중압감이나 기름기 따위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솔직하고 치장할 줄 모르는 그의 음악적 색깔은 비록 세련됨이나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고아한 격조가 느껴진다. 그의 음악은 기본적으로는 작품의 정신적인 측면을 염두에 두고는 있지만,관념적이거나 추상적인 형용의 추구가 아닌 대단히 현실적이고 기능적인 측면이 강조되고 있었다. 이는 리허설에 임하여 단원들에게 요구하거나 지시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는데,그의 음악적 요구나 지시사항은 놀랄 만큼 실제적이어서 웬만한 논리가 아니면 반발하기 힘들었고 그에 따라 단원들로부터 진정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협조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뵘은 빈 고전파의 전통을 항상 최고의 선으로 지향하였으며,그 전통 앞에서 항상 겸허하였으며,또 그것을 소중히 지켜나감을 생의 지상과제요,목표로 간주하였다. 특히 모차르트는 뵘에게 있어 이상적 존재로서,평소 말수가 많지 않았다고 전해지는 그로서는 예외적으로 많은 설명을 곁들였으며,저술과 대담을 통해 그가 가장 경외의 대상으로 삼았던 음악가로 주저 없이 모차르트를 들었고,그 음악을 바르게 해석하고 알리는 것을 일생동안의 사명으로 생각했다. 그가 남긴 5종의 인터뷰 음반들 중 4가지가 모차르트에 관련된 것이라는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뵘은 독일 후기낭만주의 음악의 정통적 적자라고 판단되는 지휘자에게 계승되는 '아르투르 니키쉬 링 (Arthur Nikisch Ring)'의 계승자이기도 하다. 
빈 고전주의 음악을 지휘할 때와는 대조적으로 그가 바그너나 R. 슈트라우스 등 후기낭만파 작곡가들의 작품을 다룰 때에는 악보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으로 많은 악상기호를 무시하며,간결하고 명확한 프레이징에 엄청난 템포로 밀어부치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이는 코레페티토어를 하던 그의 경험의 산물로서 가수로 하여금 한 번의 호흡으로 많은 프레이즈를 부르게 하기 위함이었고, 이와 더불어 무한선율이 강조되는 효과까지도 얻게 되는 것이었다. 
항상 냉철하게 한 발짝 떨어진 위치에서 대상을 관망하는 스타일을 보이는 그도 후기낭만주의 작품의 해석에 있어서는 항상 그 작품의 중심에 서서 일도양단의 정면 승부를 벌였다. 
이는 후기낭만주의야말로 뵘 자신의 예술적 언어에 다름 아니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의 바그너는 전후 바그너 해석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것으로서 극도의 생략과 암시로 상징성을 극대화하려는 빌란트 바그너의 신바이로이트 양식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 것이었기에 그 결과물들이 최상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뵘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통해 자신이 영향을 받은 모든 음악과 환경을 하나로 합일시킬 수 있는 해답을 얻었다고 할 수 있었다. 
즉,슈트라우스는 고전과 낭만,현대가 한데 어우러진 결정체이며,그것은 그라츠,빈,뮌헨,다름슈타트, 함부르크,드레스덴,잘츠부르크,베를린 등 자신이 거쳐왔던 모든 도시들의 전통과 현재가 하나됨을 의미했다. 
모차르트가 그의 이상이었고 바그너가 그의 언어였다면,슈트라우스는 그 이상의 실현과도 같은 의미를 지녔다고 할 수 있었다. 
뵘의 음악은 '니키쉬-뵘 링 (Nikisch-Boehm Ring)'의 계승자인 주빈 메타 (Zubin Mehta)나 칼 뵘 상 (Karl Bohm Preis)의 수상자인 랄프 바이케르트 (Ralf Weickert) 등 뿐 아니라 많은 후대 지휘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나,명목상 그의 후계자라고 하는 이들 지휘자들이 보이는 행보는 뵘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를 뿐 아니라,어쩌면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라 하겠고,그 성과는 논외로 하더라도 이제는 음악계와 지휘계가 얼마나 다른 환경에 놓여 있는가를 말해 주고 있는 것이라고도 하겠다. 결국 인정하기 싫은 일이긴 하지만, 정말 '거장들의 시대'는 이제 막을 내린 듯 하다. 

2.칼 뵘이 남긴 음반들

뵘은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왕성한 녹음활동을 하여 많은 양의 음반들을 남기고 있으나,실제연주와 음반은 엄연히 다른 것이라는 뚜렷한 주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회고록에서 그 자신이 술회한 스튜디오 녹음시의 스타일을 살펴보면,수정이 필요할 경우를 대비해서 한 작품을 여러차례 녹음해 두고 프로듀서에게 알아서 고르라고 하였다 한다. 몇 소절만을 잘라 녹음하고 그것을 편집하는 행위를 그로서는 용납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뵘의 리허설이 엄격하고 고된 것이었다는 얘기는 널리 알려져 있지만,그는 정해진 리허설에 있어서 단원들과 타협하거나 연습시간을 줄여서 단원들을 기쁘게 하지는 않았다. 그의 견해로 볼 때,리허설 시간은 그에게 주어진 권리였으며,무엇보다도 철저한 리허설은 실제연주에서 청중을 납득시킬 수 있는 연주를 들려주는 필수적인 근거가 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그와 동시에 그는 항상 단원들에게 '실제 본 연주에서는 리허설 때 연습한 것은 잊어도 좋다'고 했다 한다. 
본 연주에서는 어떤 그 이상의 무엇인가가 작용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확하고 철저한 연습을 통한 완벽한 연주와 플러스 알파... 그와 같은 시대를 살다간 다른 많은 지휘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지만,특히 뵘의 경우에 있어서 우리가 그의 실황녹음을 들어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드레스덴의 작센 국립가극장 시절인 1935년 작센 슈타츠카펠레를 지휘하여 그의 생애 첫 레코딩으로서 알베르트 로르칭 (Albert Lortzing)의 징슈필 <차르와 목수,Zar und Zimmermann>중 나막신춤과 <물의 요정,Undine> 중 발레음악을 녹음한 것을 시발점으로 하여 그는 드레스덴 시기를 통해 엘렉트롤라(독일 EMI) 사에서 꽤 많은 SP녹음들을 남겼다. 
그 중에는 베토벤 교향곡 9번이나 기제킹,피셔 등과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들,바그너와 슈트라우스의 관현악곡들,브루크너 교향곡 4,5번(원전판),브람스 교향곡 4번 등과 같이 역사적인 연주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 녹음들은 1979년에 EMI에서 그의 85세를 기념하여 '뵘의 드레스덴시기 녹음전집물'이라는 LP로 재발매되기도 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한 동안 EMI에서 빈 필과 몇가지 레코딩을 하였던 뵘은 1950년대 들어 본격적인 레코딩 활동을 재개하면서 1953년 DG와 전속계약을 맺는다. 
당시 DG에는 베를린 필이 있었기에 그는 첫 해인 1953년에 베를린 필을 지휘하여 베토벤 교향곡 5번을 첫 레코딩으로 내어 놓은 것을 시작으로 하여 베를린 필과 함께 베토벤 교향곡 3,7번,브람스 교향곡 1,2번,슈베르트 교향곡집,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관현악곡 등을 녹음하였다. 
물론 이 시기에도 빈 필과는 DECCA에서,빈 심포니와는 PHILIPS에서 계속적으로 음반녹음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베를린 필을 지휘하여 1959년에서 1968년에 걸쳐 녹음한 모차르트 교향곡집(DG)은 당시로서는 누구도 엄두조차 내지 못하던 대규모 기획으로서 모차르트에 대한 끝없는 애정과 정열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었던 그였기에 가능한 작업이었으며,그런 이유로 이 음반의 가치는 아직도 퇴색되지 않고 있다. 또한,그는 많은 양의 모차르트 오페라 녹음도 남기고 있는데,영상물을 포함한 4종의 <피가로의 결혼,Le nozze di Figaro>,2종의 <돈 죠반니>,2종의 <마술피리,Die Zauberflote> 등은 평자에 따라 평가가 극단적으로 나뉘어지는 경우가 있지만,역시 영상물을 포함하여 무려 4종에 달하는 <코지 판 투테,Cosi fan tutte>의 녹음들 중 두 번 째 녹음인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의 스튜디오 녹음 (EMI)은 그의 모든 모차르트 오페라 녹음들 중 단연 발군이라는 평가를 내리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으며 완벽한 앙상블이 무엇인지 경험할 수 있는 명반이다. 

뵘의 음반을 논함에 있어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바그너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일 것이다. 
그의 바그너 음반은 모차르트나 슈트라우스의 그것과 비교할 때 결코 많은 양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모두가 최상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어떻게 보면 젊은 세대들로 하여금 그의 음악에 열광하게 만드는 음반들은 결국 모두 그의 바그너 음반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가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실황으로 남긴 음반들은 하나같이 그 작품의 명반에 있어 첫머리에 꼽히는 연주들이다. 그가 남긴 모든 음반들 중 가장 완성도 높은 음반이라고 평가해도 좋을 1966년 실황의 <트리스탄과 이졸데>(DG)는 비르기트 닐손(Birgit Nilsson)과 볼프강 빈트가센(Wolfgang Windgassen) 등 최고의 가수들과 오케스트라가 뵘의 지휘봉 아래 한덩어리가 되어 피날레에 이를 때까지 모든 것을 불살라버리는,한 마디로 뜨거움이 느껴지는 음반이다. 1966년과 67년의 공연 실황을 담고 있는 <니벨룽의 반지>(PHILIPS) 역시 반지라는 악극 속에 내재된 '힘 (die Macht)'이라는 속성에 몸서리 처지도록 집착하는,그래서 더욱 무서운 집중력이 느껴지는 연주로서 바그너 악극에 대한 뵘 특유의 본능적인 스타일이 진하게 배어있는 명연이다. 1971년 실황을 담고 있는 <방황하는 네덜란드인>(DG) 또한 휘몰아치는 폭풍 그 자체다. 청년 바그너의 끓어오르는 혈기를 80을 바라보는 노지휘자의 지휘봉 끝에서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경험이 아닐 수 없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예술적 적자인 만큼 뵘의 슈트라우스 레코딩은 양적으로 그의 모차르트 레코딩에 육박할 정도다. 
그는 주로 오페라 음악감독의 입장에서 슈트라우스의 음악을 다루었던 까닭에 적어도 음반상으로 볼 때,관현악곡의 녹음들보다는 오페라 녹음들이 그 완성도 면에서나,역사적 가치 면에서나 더욱 높이 평가되고 있다. 
우선 첫손에 꼽고 싶은 음반은 1977년 빈 국립가극장 실황의 <그림자 없는 여인,Die Frau ohne Schatten>(DG)이다. 
뤼자넥,킹,닐손,베리 등 '좋았던 시절'의 대표주자들이자 각 배역에 있어 다시 모으기 힘든 최고의 가수들의 절창에 뵘과 빈 국립가극장이라는 둘도 없는 단짝이 빚어낸 슈트라우스 미학의 정수이다. 
실황이기 때문에 부득이 3막에서 실제 무대에서 구현하기 힘든 부분들을 많이 삭제시킨 공연이긴 하지만 정말 이제는 다시 이루어 낼 수 없는 명연으로서,그 자신이 이미 1955년에 남긴 스튜디오 녹음 (DECCA)을 훨씬 뛰어넘는 <그림자 없는 여인> 최고의 명반이다. 또한 1960년 드레스덴에서 녹음된 <엘렉트라>(DG)는 이 작품이 지닌 잔혹성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고 있는 무시무시한 연주로서 복수의 순수성과 정의라는 표적을 정확히 명중시킨 쾌연이다. 앞서 언급한 두 음반들 외에 <살로메,Salome>의 1970년 함부르크 실황,<장미의 기사>의 1969년 잘츠부르크 실황,<아리아드네>의 1954년 잘츠부르크 실황,<아라벨라,Arabella>의 1947년 잘츠부르크 실황,<말 없는 여인>의 1959년 잘츠부르크 실황,<다프네>의 1964년 안 데어 빈 극장 실황,<카프리치오,Capriccio>의 1971년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과의 스튜디오 녹음 등이 있다.


다름슈타트 시절에서부터 시작된 뵘과 베르크의 인연은 평생동안 뵘으로 하여금 베르크의 두 오페라 작품,특히 <보체크>를 전세계 가극장에 전파시키는 전령사 역할을 기꺼이 하도록 만들었다. 그가 1960년대 베를린 도이치 오페라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 시절 녹음된 뵘의 <보체크>(DG)는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 (Dietrich Fischer-Dieskau)와 이블린 리어 (Evelyn Lear)라는 탁월한 두 주연가수의 시대를 앞서간 표현력과 뵘 특유의 냉철함이 번뜩이는 명연으로서 보체크의 음반 수가 몇 배로 불어난 오늘날에도 그 음악적인 측면에 있어서 전혀 빛을 잃지 않고 있다. 
그는 많은 오케스트라들과 깊은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지만,그의 음악과 가장 자연스럽게 일체감을 이룰 수 있었던 오케스트라는 역시 빈 필이었다. 
그 때문에 1971년 빈 필이 데카와의 독점계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지자 노구를 이끌고 빈 필과 함께 자신의 전속이었던 DG에서 베토벤 교향곡 전집,브람스 교향곡 전집,모차르트의 주요 교향곡과 레퀴엠 등을 녹음하며 좀더 많은 기록들을 남기려 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던 것이다. 
빈 필과의 70년대 DG 레코딩들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연주로는 베토벤의 <제6번 전원,Pastorale>을 들 수 있다. 
빈 필의 풍성하고 우아한 현의 질감이 돋보이는 1,2악장,빈 필 특유의 관악기들이 그 매력을 한껏 발산하는 3,4악장,훌륭한 앙상블과 아름다운 음향이 감동적인 5악장에 이르기까지 빈이라는 도시의 음악적 전통이 베토벤의 작품을 향해 표현해 낼 수 있는 최상의 경지를 보여주는 고급스런 연주이다. 
기본적으로는 역시 오페라 지휘자였고 엄격한 심포니 지휘자이기도 했던 뵘에게 있어 협주곡의 연주나 녹음은 그다지 많지는 않은 것도 사실이다. 
베토벤이나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들,또는 모차르트의 협주곡 약간 정도... 그런 의미에서 1967년에 빌헬름 박하우스(Wilhelm Backhaus)와 함께한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의 기념비적인 녹음은 그 의미가 남다르다. 
뵘은 존경하던 피아니스트 박하우스와 이미 1953년에 브람스 1번 협주곡을,1955년에 모차르트 27번 협주곡 (DECCA)을 녹음한 바 있었는데,이 두 거장의 인연은 더 멀게는 드레스덴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9년에 뵘과 박하우스는 엘렉트롤라 사에서 브람스 협주곡 2번을 녹음하였던 것이다. 
거의 30년만에 같은 곡을 재녹음하는 두 거장의 원숙한 만남은 불멸의 가치 그 자체이다. 
뵘은 드레스덴 시절부터 브루크너 교향곡의 레코딩을 선보인 적이 있었고, 콘서트에서 적극적으로 다룬 레퍼토리는 아니었지만 꾸준히 나름의 브루크너 관을 음악으로써 피력해 왔었다. 
그의 DECCA 녹음으로서는 가장 후기의 녹음인 빈 필과의 브루크너 교향곡 3번(1971)과 4번(1973)의 연주는 그 결정체로서 특히 4번(1878년 신판 사용)은 가장 뛰어난 명반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생애에 있어서 마지막 녹음은 1981년 4월에 녹음된 오페라 영화 "엘렉트라" (DECCA)의 사운드 트랙 녹음이지만,공식적인 음반 녹음으로서 마지막 녹음은 1980년 11월에 빈 무직페라인잘에서 녹음된 베토벤의 <제9번 교향곡 - 합창,Choral>(DG)이다. 
그 연주내용에 대해서는 비록 모든 감상자들이 호의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은 아니지만,노대가의 커리어의 종착점으로서 큰 가치를 지닌다 하겠다. 
이외에도 뵘이 거의 다루지 않았을 법한 레퍼토리들의 레코딩도 꽤 있는데,베르디의 오페라 중 유독, <맥베드,MacBeth>만큼은 1943년(독일어)과 1970년(이탈리아어) 두차례의 빈 국립가극장 실황반을 남기고 있고,1944년 빈 국립가극장 실황의 <오텔로>(독일어)의 음반 (PREISER)도 남아 있다. 
또한,프로코피예프의 <피터와 늑대,Peter und der Wolf)>(DG)의 레코딩 역시 그로서는 예사롭지 않은 레코딩이라 하겠는데,그의 외아들로서 독일 최고의 배우로 명성을 얻고 있었던 칼하인츠 뵘 (Karlheinz Bohm)을 나레이터로 기용하여 부자애를 과시하기도 했다. 
또한 요한 슈트라우스 가문의 왈츠들은 그가 레코딩 초기부터 다루었던 레퍼토리들이었음에도 그의 이미지와는 썩 잘 어울린다고 보기는 힘든 것이 사실인데,1972년에는 야노비츠,빈트가센,베히터 등의 가수들을 기용,빈 필을 지휘하여 <박쥐,Die Fledermaus> 전곡(DG)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의 빈 왈츠들은 약간 촌스러운 시골 귀족과도 같은 느낌을 주고 있어 단정하긴 하지만,세련미는 없는 소박함을 띠고 있어 오히려 우리에게는 유머러스한 친근감 때문에 호감을 갖게 만드는 연주들이기도 하다. 
그는 평소 오케스트라 리허설 전에 항상 짤막한 만담으로 단원들을 한바탕 웃게 만든 뒤,연습에 임했다고 하는데 단원들의 폭소를 터뜨린 것은 그 만담이 우습거나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그의 지독한 슈타이어마르크 지방 사투리 때문이었다고 한다.

<출처: 클래식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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