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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아버지 예후다와 미리엄 리베르만 주커만 부부의 아들인 핀커스 주커만 텔 아비브 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폴란드의 나찌 강제 수용소에서 살아남아 1947년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음악가 집안의 아이였던 핀커스는 다섯살에 그의 아버지에게서 처음으로 음악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리코더와 클라리넷으로 시작해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바이올린을 배우게 되었다. 8살의 나이에, 주커만은 텔 아비브 음악 학교에서 헝가리 출신의 유명 바이올리니스트 Ilona Feher를 사사했다.

핀커스 주커만 (Pinchas Zukerman) Conductor, Violinist

1948년 7월 16일 출생

1961년, 이스라엘을 방문중이던 스페인 출신의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와 러시아 출신의 바이올린 대가 아이작 스턴은 어린 주커만의 연주를 듣게 되었다. 그의 연주에 감명받은 스턴은 10대 소년인 주커만의 음악 교육의 방향을 지도해주었다. 1962년 아이작 스턴과 헬렌 루빈스타인, 그리고 미국-이스라엘 문화 재단의 후원으로 주커만은 미국 줄리어드 음악 학교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20세기 최고의 바이올린 교육자 중 한 명인 이반 갈라미언의 문하에 들어가게 된다. 1903년 이란에서 태어났고 러시아와 프랑스에서 수학한 갈라미언은 주커만에게 바이올린 비올라를 가르쳤다. 줄리어드에서 공부하는 동안, 주커만은 피아니스트 유진 이스토민의 부모님의 집에서 거주하면서 예술 고등학교와 일반 고등학교를 모두 다녔다.

갈라미언과의 수업이 늘 매끄럽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엄격한 연습 스케줄과 기본기를 중시하는 갈라미언의 훈육 방식은 젊은 영재를 늘 힘들게 했다. 그는 후에 한 인터뷰에서 가끔 학교를 빼먹고 뉴욕의 거리를 어슬렁거렸다고 인정했다. 주커만의 불성실한 태도에 실망했던 그의 멘토 스턴은 그에게 이스라엘로 쫓겨 가든지 아니면 좀 더 심각하게 학업에 열중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엄포를 놨고 덕분에 젊은 음악가는 다시 학업에 열중하게 되었다.


1967년, 제 25회 레벤트리 국제 콩쿨에서 정경화와 공동 우승한 주커만은 이후 콩쿨 우승과 건강 문제로 연주를 할 수 없었던 스턴을 대신하여 몇 차례 협연하면서 전문 연주자로의 인지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St.Paul Pioneer Press'지(紙)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학생 시절을 회상했다:"저는 제 안에 뭔가 바이올린을 통해 말하고 싶은게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리고 언젠가는 그것을 표현해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죠. 스턴과 갈라미언의 지도를 통해 다행히 그 순간이 찾아왔어요."

비록 그가 줄리어드에서 악기 연주를 중점적으로 공부했지만, 주커만은 지휘법의 기본을 충분히 접할 수 있었다. 그가 지휘자의 길을 심각하게 생각하게 된 계기는 1960년대 후반, 그와 막역한 사이인 이스라엘 출신의 음악가 다니엘 바렌보임이 지휘했던 잉글리쉬 챔버 오케스트라와의 연주였다. 수석 바이올리니스트(악장 또는 콘서트 마스터)로 연주해 참여했던 주커만은 오늘날의 전문 지휘자의 형식이 자리잡기 이전 시대의 전통을 따라 악장의 자격으로 바흐 비발디의 작품들을 연주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1974년, 그는 이 오케스트라에서 공식 지휘자로서의 데뷔 무대를 갖게 된다. 이후 몇년간, 그는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국립 교향악단,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그리고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같은 세계 정상급 교향악단의 객원 연주자로 활동했다.




1980년, 주커만은 세인트 폴 챔버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에 취임해 이후 7년간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게 된다. 

세인트 폴 기간에, 그는 악단의 규모를 키우고 지역 연주회의 유료 관객을 3배로 끌어올렸으며 오케스트라가 상주할 전용 콘서트 홀인 오드웨이 극장(Ordway Theatre)를 건립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의 지휘 아래, 오케스트라는 주요 음반사와 여덟 장의 음반을 발매했고 미국과 중남미에 걸친 장기 순회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세인트 폴에서의 주요 관심사는 지휘였지만, 주커만은 종종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하고 악장 자격으로 연주를 하며 전문 솔리스트의 경력도 포기하지 않았다. 1987년, 그는 음악 감독이 필연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행정적인 측면의 책임감에 대한 거부감으로 세인트 폴을 떠나게 되었다.


세인트 폴을 떠나고 전문 연주자의 길로 돌아온 주커만은 몇몇 계절별 행사에서만 간간히 지휘를 맡으며 지휘의 길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다. 볼티모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여름 음악 페스티벌의 음악 감독, 런던 사우스 뱅크 페스티벌의 지휘자, 그리고 댈러스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국제 여름 음악 페스티벌의 지휘자의 자리를 3년씩 맡은 그는 댈러스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수석 객원 지휘자로 2년여 임명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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