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베르트 Schubert, Franz Peter (1797-1828) 작곡가

슈베르트 Schubert, Franz Peter (1797-1828) 오스트리아, 작곡가

리히텐탈(빈)출생. 초기 독일낭만파의 대표적 작곡가의 한 사람으로 ‘가곡의 왕’으로 불리고 있다. 아버지는 빈 교외의 리히텐탈에서 초등학교를 경영하고, 어머니는 장인(匠人)의 딸이었다. 그의 음악적 천분은 일찍부터 두드러져 8세 때 교회의 합창지도자들로부터 가창·바이올린·피아노·오르간 등의 기초적인 지도를 받고 11세 때 아름다운 소년 소프라노 음성을 인정받아 빈 궁정예배당의 합창아동으로 채용되어 국립 기숙신학교(寄宿神學校)에 들어갔다. 여기서 궁정 오르간 주자 루치카, 궁정악장 A.살리에리에게 작곡법을 배워 작곡을 시작하였으며 16세 때 1년 과정의 교원양성학교에 다닌 후 아버지가 경영하는 학교의 저학년 수업을 담임하기도 하였다.

1814년 《실을 잣는 그레트헨:Gretchen am Spinnarde》(작품 2 ·D. 118)을 비롯하여 많은 가곡과 3곡의 현악4중주곡 등을 작곡하였다. 1815년에는 《들장미:Heidenrö slein》(작품 3-3·D. 257), 《마왕 Erlkö nig》(작품 1·D. 328)을 비롯한 약 145곡의 가곡과 2곡의 교향곡, 그리고 이 밖에도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으나 그의 작품은 극히 일부 친구들 외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작품이 지니는 매력에 끌려 친구가 된 사람도 많았다. 1816년 초등학교 교사직에 압박감을 느낀 그는 빈자리가 생긴 라이바하의 교원양성학교에 음악교사로 취직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또 이 해에 친구 슈파운의 권고로 바이마르에 사는 괴테에게 이제까지 괴테의 시를 가사로 작곡한 가곡을 몇 작품 골라 보냈으나 괴테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악보는 반환되고 말았다.

슈베르트를 세상에 알리려고 애쓴 그의 친구들은 다시 제2의 가곡집을 모아 괴테에게 보내려고 계획하였으나 그것은 그의 악보가 출판된 후 5년이 지날 때까지 실현되지 못하였다. b장조(D. 485), 그리고 가곡 《마부 크로노스에게》(D. 369), 《자장가》(D. 498), 《방랑자:Der Wanderer》(D. 489) 등이 이 시기의 작품들이다. 1816년 말경부터 그는 교직을 떠나 친구 쇼버와 같이 살면서 작곡에 전념하였는데, 이듬해 쇼버의 동생이 외국에서 돌아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 무렵 쇼버의 소개로 유명한 성악가 J.M.포글과 알게 되었는데 그는 슈베르트의 가곡을 세상에 인정케 한 최초의 가수이다.

1818년 여름 헝가리의 P.A.에스테르하지 백작집의 하계(夏季) 음악교사로 초빙된 것을 기회로 그는 집에서 나와 그 후로는 빈 시내의 친구들을 찾아 여기저기 옮겨다니는 보헤미안생활을 보내면서 작곡을 계속하였다. 1824년 여름 다시 에스테르하지 백작집의 가정교사로 초빙을 받았는데, 슈베르트는 그 후로는 공직을 맡은 적이 없었으며, 아내도 가정도 없이 1828년 11월 19일 31세의 짧은 생애를 마쳤다. 그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전년에 작고한 벨링크묘지에 있는 베토벤의 무덤 가까이 묻혔으며, 88년 두 묘는 빈의 지멜링크 중앙묘지로 옮겨졌다. 

슈베르트는 베토벤을 깊이 존경하였고, 또 평생의 대부분을 빈에서 보냈으며 그 곳에서 음악활동을 하였으므로 베토벤과 비교해 보면 슈베르트의 작풍을 잘 이해할 수 있다. 베토벤은 음악을 계시로 생각하고 스스로 선민(選民)으로 자처하였다. 이것은 당시 독일 유식계급의 눈에 비친 프랑스혁명이나 나폴레옹 초기 활동의 지도이념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러나 슈베르트는 이와 같은 선민의식을 갖지 않았고, 스스로 즐기며 타인도 즐겁게 하려고 작곡을 하였다. 이 즐거움은 메테르니히의 보수정책에 의하여 언동에 제약을 받아 현실에서 눈을 돌려 예술에서 도피장소를 찾으려는 오스트리아의 유식계급과, 거기에 안주하려는 서민계급의 즐거움으로 다분히 감상성(感傷性)·안이성·비논리성을 내포하고 있다. 여기에서도 슈베르트음악의 특징의 하나인 비구축성(非構築性)이 유래된다. 그의 교향곡·실내악·피아노소나타 등이 형식적으로는 소나타이기는 하나 실제는 아름다운 선율의 연계로 되어 있음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그 이전의 빈고전파의 작곡가들과 같이 오페라·실내악·피아노곡·교회음악·가곡 등, 협주곡을 제외한 모든 부문에 걸쳐 있고 작품량은 그의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극히 많은 셈이다. 오토 에리히 도이츠의 연대순(年代順)으로 정리된 작품번호(D.로 약기)에 따르면, 작품수는 998개에 이르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약 633곡의 가곡이며, 이전의 고전파시대에는 별로 주목되지 않았던 가곡이라는 예술부문이 슈베르트에 의하여 아름다운 선율과 색채에 넘치는 화성(和聲)에 힘입어 비로소 독립된 주요한 음악의 한 부문으로 취급된 점이다. 

1814년의 가곡 《실을 잣는 그레트헨》이 새로운 가곡양식의 제1보가 되는데, 이것은 변주유절가곡(變奏有節歌曲)의 형식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의 가곡형식은 그 밖에도 다양하여 《들장미》와 같은 엄격한 유절가곡(有節歌曲), 자유스러운 보통가곡, 낭창(朗唱)양식을 갖는 것들이 있으며, 이 다양한 가곡형식은 그 후의 R.A.슈만, F.리스트로부터 R.슈트라우스에 이르는 독일가곡의 작곡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는 교향곡을 비롯한 기악곡분야에서도 풍부한 선율과 아름다운 화음에 의하여 고전적인 단정함과 낭만적인 서정성이 감도는 많은 작품을 창출(創出)하였다.

W.뮐러의 시에 곡을 붙인 가곡집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처녀:Die schö ne Müllerin》(작품 25·D. 795 ·1823 ·전20곡), 《겨울나그네:Die Winterreise》(작품 89·D. 911·1827·전24곡), 교향곡으로는 《미완성교향곡》 B단조 제8번(D. 759·1823), 《교향곡 제9번》 C장조 (D. 944·1828:종래에는 제7, 또는 제10이라고도 하였음), 실내악으로는 현악4중주곡 D단조 《죽음과 소녀》(D. 810·1824), 피아노5중주곡 A장조 《숭어 Die Forelle》(D. 677·1819), 피아노곡으로는 8곡의 《즉흥곡:Impromptus》, 6곡의 《악흥(樂興)의 때:Moments Musicaux》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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